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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통째로 사라졌어요..” 도시를 덮친 아파트 70층 높이의 거대 물폭탄 속 2,000명의 마지막 순간

사무실에서 산사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가볍게 지나갈 산사태에 대비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암석들이 댐을 덮쳐 엄청난 양의 물이 범람하였고 댐 아래에는 2,0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주에 위치한 포르데노네, 이곳에 위치한 바운트 댐은 1900년대 1차 세계대전의 전투 현장이었던 피아베강의 지류인 바운트 강에 위치하고 있다.

바운트 댐은 주변의 산이 대부분 수직 절벽의 형태로 높이가 높아 댐 또한 약 260m에 달하는 높이로 설계되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댐 중 하나로 꼽힌다.

사실 이 댐은 1920년대 이탈리아 엔지니어 카를로 세멘자에 의해 설계되었지만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의 독재가 장기화되며 건설이 계속해서 미뤄져 왔고 댐이 건설될 바운트강의 깊은 협곡 또한 지질학적으로 불안 요소가 많아 산사태가 종종 발생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초기에 댐 설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럼에도 건설을 맡았던 SADE는 정부와 결탁하여 댐 건설을 강행하였고 특히 정부는 댐에 대해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언론과 주민들을 모두 적대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탄압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댐 건설은 1957년 7월부터 1959년 10월까지 2년 3개월에 걸쳐 모두 마무리되었고 이후 1960년 1월부터 저수지의 물을 채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댐이 위치한 지점은 댐 건설 이전부터 산사태가 자주 발생했던 곳으로 댐 설치 도중과 설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특히 1960년 11월 저수지의 수위가 약 180m에 달하였을 때 산사태로 엄청난 양의 흙과 암석이 저수지로 유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SADE 측은 긴급하게 수위를 130m까지 낮추었는데 이것은 추후 벌어질 대재앙의 전조 증상에 불과했다. 이미 몇 차례 산사태를 겪었음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저수지의 물을 채웠고 결국 수위는 250m까지 올라간다.

시간이 흘러 1963년 10월이 되었을 때 당시 댐에 채워진 저수지 물로 인해 주변 산의 지층이 무너져 계속해서 산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고 댐 관계자들과 정부는 얼마 가지 않아 큰 산사태를 예견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계산상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건 당일인 1월 9일 이 지역의 시장은 선언문을 발표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대피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그것의 내용은 “오늘 밤 댐 위로 약간 물이 넘칠 수 있다.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였다.

그리고 곧 큰 산사태가 임박했다고 판단한 댐의 엔지니어들은 이날 저녁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쓰나미를 구경하기 위해 댐 꼭대기에 모여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모두 긴장한 상태였지만 여느 때처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눈에 봐도 몸을 굳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산사태는 몬태톡 산 꼭대기로부터 발생하였는데 숲과 그리고 거대한 암석 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고 무려 길이 2km에 달하는 산사태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떨어져 먼 거리에 있던 비엔나와 브뤼셀까지 지진 충격이 감지될 정도였다.

곧장 바운트 댐의 저수지로 추락한 산사태의 충격으로 저수지에는 3개의 거대 파도가 발생하였는데 이 중 5,000만 입방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파도는 저수지를 넘어 댐으로 미친 듯이 흘러간다.

당시 물의 모습은 마치 모든 걸 쓸어버릴 것만 같았고 약 250m에 달하는 초대형 쓰나미는 지금 보이는 마을 사진의 뒷배경 중 파란 하늘을 모두 가릴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이 파도는 댐을 넘어 아래 계곡의 돌이 많은 구간을 덮쳤고 이 돌들을 순식간에 머금은 채로 댐 하류에 위치해 있던 롱가론 마을을 시작으로 주변의 크고 작은 마을들을 차례대로 덮쳤다.

그 중 댐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던 롱가론 마을은 다른 곳보다 피해가 컸는데 마을 자체가 싹 다 쓸려 내려가 아예 모습 자체가 사라져 버릴 정도였고 댐의 주변에는 깊이 약 70m에 달하는 분화구 형태로 된 거대 쓰나미의 흔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난 흙더미와 건물 더미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장비를 사용해 구조를 했다가는 상처를 입힐 수 있었기 때문에 손으로 땅을 파내는 등 제한 사항이 많았다.

다행히 사고 발생 직전 마을을 빠르게 빠져나온 생존자들은 본능적으로 큰 소리를 듣고 이상함을 감지해 대피하였는데 그들은 거대 쓰나미가 마을을 덮치기 전 엄청난 양의 공기에 의해 발생한 바람이 먼저 마을에 도착해 곳곳을 파괴하였고 이 소리를 듣고 급히 탈출하였다고 한다.

결국 각지에서 몰려든 900명의 구조대원들의 노력으로 약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신원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이때 구조대는 이미 사람들이 구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거기다 당시 사회적 배경상 몇 명의 인원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고, 몇 명이 실종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인원은 대략적으로 집계되었고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롱가론 마을의 경우 약 1,300명 중 1,2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건 당시 댐 꼭대기에서 모니터링을 위해 머무르던 직원들 중 산쪽에 가깝게 위치한 왼쪽 제어 센터에 있던 20명과 오른편에 위치한 사무실과 숙박 건물에 있던 40명의 인원들도 산사태로 인해 전부 세상을 떠났다.

사고 이후 산사태를 직격으로 맞아 엄청난 물의 압력을 받은 바운트 댐은 놀랍게도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윗부분만 약간의 손상이 있었고 이후 댐은 폐쇄되어 현재까지도 운영되지 않고 있지만 그 모습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댐을 소유하고 있던 정부와 이를 건설한 SADE는 이 사고를 자연재해라며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는데 결국 총대를 맨 SADE의 엔지니어와 정부 관련 부서의 엔지니어가 재판에서 관대한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1968년에 SADE의 한 엔지니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정부는 대회 건설을 총괄한 SADE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다.

어떻게든 생존자들에 대한 보상금을 줄이려는 행동과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고위직들의 모습에 이탈리아 정부는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수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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