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0월 22일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노도부대 제2보병사단 공병부대 인원이 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오후 3시 30분쯤 양구군 남면 두문리 인근 야산에서 월동 준비용 싸리빗자루를 만들기 위해 싸리나무를 주우러 작업을 나갔습니다.
황하사 등 13명의 인원이 함께 작업을 나가 싸리나무를 주었고 같이 작업을 나간 인원 중 표종욱 일병이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부대는 5시 30분까지 기다렸지만 표일병은 귀대하지 않았고 그때부터 부대는 탈영으로 판단합니다.
부대는 사라진 표일병에 대한 제대로 된 주변 수색 없이 탈영으로 간주하고 표일병의 집으로 연락해 표일병이 탈영했다고 이야기하고 표일병의 관물대를 찾아보니 연애 편지가 있는데 평소 여자 관계가 어땠냐고 물어보며 가족들에게 여자 문제로 탈영한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너무 놀란 표일병의 부모는 그 다음날 부대로 찾아가 부대에서 이야기를 들었고 부대는 싸리 빗자루 작업을 하다가 탈영한 것 같다, 요즘 병사들이 여자 문제로 이런 일들이 많으니 주변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빨리 귀가 시켜달라라고 부대장이 부모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가족들은 평소 가족 모두가 화목하고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이고 성격 좋기로 유명한 아이인데 부대에서 탈영을 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그의 누나는 90년대에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올 정도로 집안의 가정 형편은 크게 부족하지 않았고 실종되기 3일 전 누나와의 통화에서 휴가 때 입을 옷이 없으니 옷 좀 사달라고 해서 점퍼를 사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탈영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백한 사고가 난 것 같다라고 가족들은 주장했지만 부대는 탈영으로만 이야기했고 심지어 2사단 헌병대 군탈 체포조는 표일병의 집에 찾아가 아들 숨겨놓은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아들 내놓으라 라며 행패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실종 이틀 뒤인 24일과 25일 부모와 친척들은 양구읍에 자리를 잡고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며 아들을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고 부모는 탈영의 걱정보다 아들이 어디로 갔는지 점점 불안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족들이 애간장을 태우며 2주일이 가까이 되던 날 11월 5일
뉴스에서 “오늘 공비 잔당 2명을 추가로 사살했습니다만 이 과정에서 아군도 영관급 장교를 포함해 3명이 전사했습니다.” 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눈치를 채셨나요? 이 기간은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로 강원도 일대가 공비토벌에 매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단순 탈영으로 처리되어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졸이던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1996년 11월 5일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무장공비 잔당 2명을 사살했습니다.
그리고 밝혀진 새로운 사실, 공비 중에 한 명이 표종욱 일병의 군복을 입고 인식표, 즉 군번줄을 차고 있던 것입니다.
심지어 뉴스 화면에 작은 누나가 표종욱 일병에게 선물한 돌핀 시계가 무장 간첩의 소지품에 나오는 것을 보고 가족들은 TV 시청 중에 모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탈영해서 어딘가 살아있다면 좋으련만 공비 토벌이 종료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탈영으로만 생각했던 동생과 아들의 행방이 사망 소식으로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TV와 뉴스에 표일병의 전사가 방송이 되고, 그 다음 날 11월 6일 오전 헌병대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탈영한 아들의 소식을 물어봤습니다.
화가 난 가족들이 뉴스도 안 보냐 텔레비전도 안 보냐 라고 소리를 지르니 뉴스하고 텔레비전이 장땡이냐! 하고 전화를 끊는 황당한 태도를 보여 가족들은 분통이 터졌습니다.
무장공비가 가지고 있던 수첩에 공비가 꼼꼼하게 전투 내용에 대해 기록했는데요. 공비들은 난파했을 때 추후 다시 오거나 후배들을 양성할 때 교육을 하기 위해서 본인들의 전투와 이동 내용을 꼼꼼하게 작성한다고 합니다.
그 수첩에서 우리 국군이 작전했던 지역 외에 또 다른 지역이 나오고, “묻고 옷을 입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표일병이 실종된 지점과 마지막 공비의 사살 지점은 약 30km 거리, 군은 이에 따라 이들이 움직인 방향으로 역추적하여 표일병 수색에 나섰고 다행히도 바로 다음 날 11월 6일 표일병은 작업을 하던 곳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낙엽 더미 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최초에 부대가 조금 더 빨리 수색 인원을 꾸려 찾으러 나섰다면 최소한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찾으러 다니는 마음을 그나마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강원도 일대는 공비 토벌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는데도 엄호하는 병력도 없이 그리고 공비에게 당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 하나 없이 병력이 없어진 것을 개인 탓으로 몰고 탈영으로 취급하는 과거 부대의 잘못된 숨기고 은폐 왜곡하려 했던 우리 군대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약에 공비가 정말 깊게 묻었다면 혹은 전투복을 빼앗지 않았다면 어쩌면 표일병의 가족은 평생 탈영병의 가족으로 기록되고 돌아오지 않는 표일병을 기다리는 상황이 벌어질 뻔 했습니다.
이에 따라 표일병의 아버지는 청와대에 진정서를 넣었습니다.
강릉에 무장공비가 출연해 전군이 비상사태에 들어갔는데도 어떻게 군이 비무장 상태에서 그것도 군 본연의 임무도 아닌 사리빗자루를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느냐.. 게다가 인솔자도 없이 13명이 각자 흩어져 작업을 하는 것이 맞느냐 라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북한 무장공비 침투해 세상을 떠난 표종욱 일병, 다시는 이러한 북괴의 도발과 군의 어처구니 없는 대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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