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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실화) 혼자서 대한민국의 모든 조폭을 쓸어버린 ‘일반인’의 충격적인 정체 ㄷㄷ

1996년 전국구 폭력조직 목포 오거리파가 뿔뿔이 해산됩니다. 그리고 이 목포 오거리파를 시작으로 전국의 폭력 조직들이 하나씩 몰락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죠.

대한민국 조폭들의 줄도산, 그 신호탄을 쏘아 올린 목포 오거리파의 실수는 단 하나 건드리지 말아야 했던 사람을 건드린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조호연’ 그는 누구였을까요?

놀랍게도 이 사람은 싸움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냥 일반인이었습니다. 그저 작은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였죠.

도대체 어떻게 평범한 직장인 한 명이 전국에 있던 모든 조폭들을 다 쓸어버린 걸까요?

1996년 6월 22일 오후 10시 20분 목포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조우현 씨는 직원 10명과 함께 목포의 유명 라이트 클럽에 회식을 하러 갔습니다.

“자 고생했어 오늘은 내가 쏘는 거니까 마음껏 즐기라고..” 그리고 조 씨와 직원들의 회식 자리가 진행되던 중 문제가 하나 생기는데요.

조 씨 일행의 술값이 정말 터무니없이 많이 나온 겁니다.

“술값이 이렇게 나와 원래 이 가격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한테 바가지 씌우는 겁니까?” 결국 조 씨의 부하 직원은 강하게 웨이터에게 항의했고 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목포를 주름 잡던 조폭 ‘목포 오거리파’가 운영하던 업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웨이터는 그 자리에서 나이트 사장 포함 무려 25명의 조폭 직원들을 불렀고 그렇게 조 씨 일행은 종업원들에게 끌려가 복날 개 잡듯이 맞고 쫓겨나게 되었죠.

그리고 다음 날 부하 직원들 앞에서 개 맞듯이 맞았던 사장 조 씨는 정말 분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려 갈비뼈 3개가 부러질 정도의 폭행을 당했던 조 씨가 원했던 건 겨우 사과 한마디였죠.

다소 순수한 발상이었지만 이것이 바로 조 씨의 첫 번째 인내였습니다. 이렇게 사람 패는 게 직업인 조폭들에게 맞은 조 씨 도대체 어떻게 사과를 받아내려고 한 걸까요.

너무나 어이없게도 조 씨는 홀로 나이트 클럽에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 해당 나이트 사장을 불러서 이야기합니다.

“상황이 어찌 됐든 부하 직원 앞에서 맞은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 회사로 찾아와서 사과해라 사과만 한다면 모든 일은 덮어두겠다.”라고 말했죠.

사실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고 나이트 두목 입장에선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나이트 사장은 부하 직원들을 시켜 조 씨를 끌고 가 폭행했고 조직원들까지 보내 조 씨의 회사에서 깽판을 치고 협박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나이트 사장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조 씨의 두 번째 인내였고 남은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걸요.

조 씨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고집이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쯤 되면 저도 여러분도 아니 모두가 사과를 받기 포기할 만한 상황이지 않나요.

아니요. 조 씨는 아니었습니다. 조 씨는 이번에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세 번째 기회였습니다. 고소장에 적힌 내용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때린 거 사과해라” 이걸 본 나이트 사장은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거 진짜 미친 놈이네.. 애들 불러와 봐 사과하러 가자” 결국 이렇게 조 씨의 광기 어린 고소장이 제출된 지 불과 보름 만에 조폭들은 조 씨의 회사에 찾아와 형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게 되었죠.

“일단 미안하게 됐수다” 어찌 됐던 조 씨는 원했던 사과를 받았고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밤 목포 오거리파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게 됩니다. 바로 조 씨의 동생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며 소주병으로 뚝배기를 깨버린 것이였죠.

세 번의 인내 그리고 세 번의 굴욕 조 씨에게 남은 건 결단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조 씨는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정말 골 때리는 방법의 복수를 시작하는데요.

조 씨의 동생이 폭행을 당한 뒤 3주 정도 지난 어느 날 목포의 한 일간신문에 3분의 1면짜리 대형 호소문 광고가 올라옵니다.

광고의 이름은 대통령께 드리는 탄원서 이 탄원서는 조 씨가 자신의 사비 몇백만 원을 들여서 올린 탄원서였습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수백만 명이 보고 있는 각종 신문에 올라온 이 탄원서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김영삼 보고 있나 내가 나이트클럽에서 회식하다 깡패한테 맞았다. 경찰에 신고해도 검찰에 고소를 해도 사과는커녕 보복만 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라엔 정의가 살아있는지 의문이다. 나는 죽어도 싸우다 죽을란다 네가 대통령이면 빨리 해결해 줘라”

한 개인이 그것도 사비로 수백만 원의 광고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올라온 탄원서의 여파는 엄청났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아직도 폭력 조직이 대놓고 설치고 다닌다는 현실 그리고 이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공권력의 무능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죠.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도 아침에 신문을 보다가 탄원서 광고문 관련 기사를 직접 보게 되었죠.

김영삼 대통령은 노발대발하며 내무부 장관부터 경찰청장까지 싹 다 불러모았습니다. 내리 갈굼의 시작이었습니다.

“경찰청장 그동안 뭐 했노.. 각각 그게 시끄럽고 니 잘 들어라 대한민국에 건달 새끼들 설치는 꼴 내 눈에 한 번 더 보이는 날엔 그날이 옷 벗는 날이다. 알았나?”

경찰청장은 바로 목포에 있는 목포 경찰서장을 호출했습니다.

“야 너 뒤질래? 내 말 잘 들어.. 오거리 판지, 너구리 판지 그 새끼들 당장 내 앞에 데려와 이거 못하면 너 나 나 둘 다 옷 벗는 거야 알았니?”

당시 실제 신문

이렇게 청장에게 먼지나게 털린 목포 경찰서장은 목포서 강력계 형사들을 모조리 불러모아 무능하다며 개망신을 주었고 이렇게 무능하다고 찍힌 강력계 형사들의 분노의 끝은 조폭들에게 향했습니다.

목포경찰서는 대대적인 수사를 통해 목포의 모든 조직들을 조지며 검거를 시작했습니다. 굳이 먼지를 털려고 하지 않아도 건달들의 악행은 끝이 없었고 검거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죠.

조 씨를 폭행했던 목포 오거리파의 조직원들은 내리갈굼의 최말단이었던 강력계 형사들에게 검거 과정에서 얼굴이 죽이 되도록 맞았고 형사들은 조 씨에게 피떡이 된 조직원들의 얼굴을 보여주며 이제 좀 분이 풀리냐며 조 씨를 달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목포경찰서는 목포 지역의 다른 건달들도 이 잡듯이 뒤져서 세상에 있는 모든 죄목들을 들어 검거했고 싸움 자랑하면 안 된다는 조폭의 성지 목포는 건달들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죠.

이 여파는 전국의 조폭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데요. 당시 김영삼은 전국의 제2의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달들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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