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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무대에서 피겨 선수가 ‘금지된 기술’을 해야만 했던 이유

1990년대 프랑스에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피겨계의 고전적인 고정관념과 인종차별로 인해 선수 본인 스스로도 ‘I’m bad girl’이라고 할 만큼 세계무대에서는 비운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 프랑스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였던 은반 위의 흑진주 ‘수리야 보날리(Surya Bonaly)’입니다.

수리야 보날리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체조선수였던 어머니에게 점프 기술을 배웠습니다.

11살 때 피겨스케이팅을 처음 접하게 된 이후 재능을 발견하고 16세에 첫 출전한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수많은 유럽 대회를 석권하며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대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ISU 유럽선수권 여자 싱글 챔피언, ISU 주니어 세계선수권 여자 싱글 챔피언, 프랑스 피겨 선수권 계보를 살펴보면 그녀의 이름이 챔피언으로 기록되지 않은 해를 찾기 여려 울 정도입니다.

ISU 유럽선수권 여자 싱글 챔피언은 연속 5년, 프랑스 피겨 선수권 대회는 자그마치 9년 연속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만큼 프랑스와 유럽에서는 그녀를 대적할 만한 실력의 선수가 없었고 명실공히 유럽을 대표하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우뚝 섰습니다. 자국인 프랑스에서의 그의 인기 또한 대단했습니다.

당시 흑인들에게 불모지였던 피겨스케이팅 종목에서 그의 활약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이후 프랑스 동계올림픽에 첫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여성 피겨 선수 최초로 4바퀴를 회전하는 기술인 쿼드러플 토 루프를 성공해 사람들을 또 한번 깜짝 놀래켰는데요.

그러나 그녀는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기술점수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예술점수로 5위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이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웅성대기 시작했고, 이내 경기 결과는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흑인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은 것이라고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예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이후에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7개의 트리플 점프를 한 수리야 보날리와 달리 5개의 트리플 점프를 한 당시 러시아 옥사나 바울 (Oksana Baiul)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정녕 그녀에게 세계대회는 허락될 수 없는 무대였을까요?

1994년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경쟁이 되던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지 않게 되면서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었던 수리야 보날리, 사람들은 그의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경기에서도 기술과 예술적인 부분까지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하지만 우승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금메달은 홈그라운드인 일본의 사토 유카 선수에게 돌아갔고 수리야 보날리는 은메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관중은 물론 누구보다도 수리야 보날리 본인도 이해할 수 없고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메달 수여식에서 수상대 단상에 올라가지 않고 빙상장 위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시상자가 은메달을 목에 걸어 수여했지만 이내 메달을 벗어버렸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불만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에게 ‘모르겠어요. 나는 운이 없나 봐요’ 라는 말을 남기고 눈물을 흘리며 퇴장했습니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세계무대에서만큼은 늘 우승을 놓쳐야 했던 수리야 보날리는 4년 뒤 1998년 사실상 그녀의 마지막 올림픽 무대인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게 됩니다.

그녀의 나이 25세이던 해였습니다.

실제 경기에서 쇼트 프로그램에서 역시 훌륭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점수가 낮아서 3위를 기록했습니다.

심판의 편파 판정에 불만을 가지게 된 수리야 보날리는 이어진 프리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녀의 프리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잠시 뒤 경기장은 놀라는 사람들의 표정과 잠시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수리야 보날리가 뒤로 360도 공중제비 넘기 기술인 ‘백 플립’을 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실제영상

이 기술은 빙상 위에서 하기에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당시 국제빙상연맹에서는 1976년부터 안전상의 이유로 금지된 기술 중 하나였습니다.

더구나 남자 선수도 하기 어려운 기술을 여자 선수인 수리야 보날리가 해낸 건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처음 보는 기술에 관중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는데요. 심사단은 금지된 기술이 시행된 것에 당황하여 말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백 플립 기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관중들은 환호하고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금지 기술을 사용한 감점으로 그는 메달권 밖으로 밀려나며 10위를 기록하게 되었고 메달은 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경기에 금지된 기술임을 그리고 시도했을 때의 감점 등의 규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수리야 보날리였습니다.

마지막 무대에서 오직 보날리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을 구사하며 관중의 환호를 받은 수리야 보날리의 얼굴 표정은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마지막 경기만큼은 심사위원이 아닌 나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준 관중을 위한 무대를 하고 싶었다”라고 말입니다.

피겨계의 편견과 부당한 판정에 그만의 방법으로 항변하고 스스로 순위와 점수에 연연해 하지 않고 멋진 팬 서비스로 수리야 보날리를 보여주고 은반 위를 내려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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