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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좀 찾아주세요..” 모두가 자고 있던 오전 6시 30분, 굉음을 내며 무너지는 아파트 속 71명의 마지막순간..

준공 4개월의 신축 아파트 이제 막 입주해 행복한 미래를 꿈꾸어야 할 아파트 한 동 전체가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성장의 시대 1960년대 서울은 6.25 전쟁 후 파괴된 도시를 다시 세우며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일제 시대까지 3개에 불과했던 한강의 교량은 60년대 후반, 양화대교, 한남대교가 추가되며 이동이 자유로워졌고 이에 서울은 동북부와 강남으로 점차 확장되죠.

정부의 적극적인 근대화 산업화 정책 추진으로 일자리를 찾아 상경하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서울, 하지만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인구 대비 턱없이 부족한 주거시설 탓에 주거비는 가파르게 증가했고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이주민과 저소득층의 무분별한 주거시설은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의 빈부 격차와 불균형 또한 점점 심해지고 있었죠. 소위 판자촌이라 불리우던 무허가 주거시설 군락이 서울 전역에 확장되던 그때 1966년 10월 31일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방한을 합니다.

식민지와 전쟁의 아픔을 겪고도 이를 극복하고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서울의 모습이 전 세계로 전파를 타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감추고 싶은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판자촌이었죠. 이를 계기로 서울 주거시설의 15%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무허가 건물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서울의 대대적인 주거환경 개선과 공급 계획이 세워집니다.

당시 여의도 새운 상가를 비롯하여 각종 부동산 개발을 잇따라 성공시켜 추진력을 인정받으며 불도저라 불리우던 서울시장 김현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울시장 무허가 건물들 좀 없애보시오”

1968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무허가 건물을 없애고 서울의 대규모 시민 아파트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죠.

“우리 서울시는 판자촌 40곳에 시민 아파트 2,000동을 공급하여 빠른 시일 내에 조속히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서울 시민을 위한 쾌적한 주거시설을 공급할 것입니다. 무허가 건물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도 입주권도 제공할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 아래 1969년 금화 시민 아파트가 최초로 완공되고, 1969년도에만 400여 동 1만 6천여 가구의 아파트가 건설되죠.

1969년 6월 사건 발생 10개월 전,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19개동 5층 규모의 와우 시민 아파트의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철거민 등 서민을 위해 지어졌던 아파트 입주권은 부동산 열풍에 덩달아 인기가 천정부지로 솟으며 웃돈을 주고 거래되었고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여러 번 손바뀜이 일어났죠.

그리고 착공 후 불과 6개월 만인 1969년 12월 26일 완공됩니다.

1970년 3월 12일 사건 발생 한 달 전, 가가호호 입주를 하던 3월의 봄날 신축인 와우 아파트 14동 주민들이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납니다.

벽에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죠. 주민들은 곧바로 구청에 신고를 했지만 담당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현장 조사조차 하지 않았고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던 그때

“건물 외벽에 균열이 생기고 콘크리트 받침 기둥이 떨어졌어요”입주를 마쳤던 14동 15가구의 주민들은 급기야 1층까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며 공포에 떨었죠.

이제서야 심각성을 알았을까요. 구청의 현장 조사 끝에 아직 빈집이 많았던 15동으로 대피시키는 조치가 취해집니다.

“14동은 보강 공사가 필요하니 괜찮은 15동으로 일단 대피하세요.”

하지만 사건 발생 당일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30분, 15동으로 대피를 한 뒤 불과 이틀 뒤인 그날의 이른 아침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거나 아침 출근 혹은 등교 준비를 하던 그때 대피했던 15동이 갑자기 엄청난 굉음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맙니다.

그 누구도 피할 겨를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죠. 무너진 아파트 한 동은 10m 아래 개인 가옥까지 덮치며 피해가 더 커졌습니다.

“우리 아이 좀 찾아주세요.” 촉각을 다투는 사고 현장 신속한 대응이 요구되는 순간이었지만 구조대원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하고 그나마도 생존자를 구할 수 있는 구조장비가 없어 시간은 더욱 지체됩니다.

오전 9시가 지나서야 구조장비를 갖추고 본격적인 구조작업이 시작되었죠. 사망자 34명 부상자 40명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 가족을 잃거나 실종하여 찾아 헤매는 주민들의 절규와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준공되어 이제 막 입주를 하던 신축 아파트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시장님 빨리 짓는 것도 좋지만 아파트는 50년 60년은 거뜬히 쓸 수 있도록 지어야 되지 않을까요?”

“15년 쓰고 다시 지으면 되지요. 그래야 당신 내 건설사도 먹고 살 수 있지 않소”

불법 하청과 공사비 횡령, 턱없이 부족했던 예산으로 책정된 4개동의 총 공사비 약 3,003만 원 입찰을 통해 13동에서 16동의 4개 동을 수주했던 대룡 건설은 그나마도 무면허 업자에게 500만 원의 커미션을 받고 재하청을 주게됩니다.

고급 아파트의 평당 공사비가 8~10만 원 하던 시절 그의 10분의 1 가격인 평당 약 1만 1천 원, 한 동 전체 700만 원도 되지 않는 공사비로 공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죠.

그리고 이는 결국 엄청난 부실 공사로 이어지고 맙니다. 철근 70개를 써야 할 기둥에 철근 5개밖에 넣지 않았죠.

게다가 시멘트 비용과 산 꼭대기까지 수돗물을 끌어오는 비용 등을 절감하기 위해 자갈과 하수돗물을 사용하며 배합 비율을 무시하고 만든 불순물 가득한 콘크리트는 그야말로 강도가 떨어지는 모래 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조사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서울시는 단기간에 공사를 끝내기 위해 기본 설계 과정을 축소시켰고 건축 시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기초 작업인 지반 공사도 생략했죠.

초기 단계를 소홀히 하며 가뜩이나 경사지고 약한 집 안에 건축된 아파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고 설계 당시 1m당 280kg이던 하중이 실제로 900kg를 넘어가게 되면서 더욱 무리가 되었습니다.

아파트 공급량에만 급급했던 서울시장, 이윤에만 눈이 먼 건설업자들과 뒷돈을 받고 지명 입찰을 하고 선장 감독을 소홀히 한 행정 관리까지 모두의 과실이 신축 아파트의 붕괴를 가속시키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사고 이후 무면허 업자가 시공한 나머지 13, 14, 16동도 차례로 철거되고 아직 건설되지 않은 시민 아파트의 건설 계획은 모두 폐기됩니다.

그 결과 1971~1977년 동안 시민아파트 가운데 101동이 철거되었고 철거비용이 447동 건립비용에 거의 맞먹는 50억 700만원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러한 충격적 사고와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부실공사 고질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으며 이는 1990년대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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