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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크고 비싼 다이아몬드를 아무도 착용하지 않게 된 충격적인 이유

왕의 보석, 프랑스의 푸른색 다이이몬드 역사상 가장 신비롭고 위험해 보이는 보석의 별명입니다.

유명한 ‘호프 다이아몬드’를 소유할 만큼 충분히 운이 좋았던 몇몇 선택된 사람들은 끔찍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의 저자 칼슈커에 따르면 이 다이아몬드는 원래 인도의 사원 우상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흰두교 사제가 그 다이아몬드가 거기 두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떼어냈습니다.

물론 그는 엄벌에 처해졌지만 호프 다이아몬드는 이미 사원을 벗어나 프랑스의 유명한 상인 장 파티스트 타베르니에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여기서부터 이 이야기가 좀 불분명해집니다. 타베르니에가 이전 주인에게서 다이아몬드를 훔쳤다는 설도 있고 그가 다이아몬드를 샀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소문에 타베르니에는 놀라운 호프 다이아몬드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심각한 열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는 이 다이아몬드를 다른 물건들과 함께 프랑스 왕 루이 14세에게 재빨리 팔아 넘겼습니다.

루이14세는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를 약간 변형하기로 결심하고 보석상에게 그것을 삼각형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세팅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2년간의 작업 끝에 호프 다이아몬드가 완성되었습니다. 루이 14세는 보통 무도회 갈 때 이 다이아몬드를 착용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왕실의 푸른 다이아몬드와 ‘프렌치 블루’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호프 다이아몬드의 저주는 루이 14세 왕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각종 병마로 고생하다가 사망합니다. 게다가 그의 자식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 시절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기는 했지만요. 왕의 후계자인 루이 15세는 공정 보석상에게 황금 양피 훈장을 위해 다이아몬드를 다시 한 번 세팅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후 루이 16세는 몇몇 소식통에 따르면 종종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아름다운 보석을 두르고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둘 다 프랑스 혁명 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호프 다이아몬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왕실 보물 창고에서 도난당했습니다. 몇 년 후 다이아몬드가 갑자기 영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갔을까요? 몇몇 소식통에 따르면 그것이 실제로 영국왕 조지 4세의 소유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이 왕의 인생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권의 위신을 떨어뜨렸고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통치자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건강하지 못한 생활 방식 때문에 극도로 뚱뚱해졌고 백내장으로 인해 시력을 거의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렇게 후손도 없이 위장 출혈로 사망했죠.

또한 막대한 부채를 남긴 조지 4세가 죽은 후에 호프 다이아몬드는 사적인 경로를 통해 팔렸다고 합니다.

다음에 기록된 이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다이아몬드의 주인은 부유한 런던 은행가 토마스 호프입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형 핸리 필립 호프가 다이아몬드를 얻었고 심지어 1839년 그의 보석 컬렉션 카탈로그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헨리는 같은 해에 죽게 됩니다. 이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의 크고 화려한 보석 컬렉션을 상속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헨리의 조카인 토마스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는 10년 동안 법정에서 그 컬렉션의 소유권을 위해 싸웠지만 결국에 보석 컬렉션은 붕괴됩니다.

행복한 주인은 헨리의 큰 조카인 헨리 토마스 호프였죠.

놀랍게도 이 다이아몬드는 몇 년 동안 그 집안에 머물렀고 따라서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는 ‘호프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다가 1902년에 런던의 보석 상인에게 다시 한 번 팔렸습니다.

그 후에도 호프 다이아몬드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터키의 마지막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입니다.

그가 다이아몬드를 산 직후 그의 삶은 청년 터키 당 당원들의 군사혁명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추방되었고 감금된 채로 말년을 보냈습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 후에 호프 다이아몬드를 구입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피에르 카르티에였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맥린 가족에게 팔았습니다. 에블린 월시 맥린은 호프 다이아몬드를 너무나도 좋아했고 거의 매일 착용했습니다.

때로는 강아지의 목줄에 달아서 개가 목에 걸고 다니도록 두었습니다. 집 안에서만 말이죠.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먼저 에블린의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9살짜리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결국 사망했고요. 그러는 동안 부부의 사이도 멀어졌고 다른 여자와 함께 떠나버린 남편은 나중에 정신병원에서 죽게됩니다.

맥린가는 유명한 워싱턴 포스트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가족 사업 역시 동시에 파산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에블린의 딸이 25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블린은 ‘호프 다이아몬드’의 저주를 믿지 않았고 그 보석을 집 안에 보관했습니다.

그 후 에블린도 죽게되고 가족이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자식들은 재정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팔아야만 했습니다.

저주에 대한 소문에도 굴하지 않고 유명한 미국 보석상 해리 윈스턴이 호프 다이아몬드를 매입합니다.

향후 10여 년 동안 해리 윈스턴사가 개최한 많은 전시회와 자선 행사에서 호프 다이아몬드는 인기 전시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다이아몬드가 오랫동안 이 회사 소유로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해리 윈스턴은 이 다이아몬드를 스미스소니안 연구소에 국립자연사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오늘날까지도 호프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현재 호프 다이아몬드는 무게가 45 캐럿이 조금 넘고 여전히 짙은 회색빛에 푸른색을 띠고 있으며 단파 자외선에 노출되면 위험스러워 보이는 붉은 빛을 내기도 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여전히 엄청난 액수의 가치가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풍부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것이 저주 받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열띤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911년 뉴욕 타임즈는 이 다이아몬드의 피해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목록을 발표했습니다.

그 목록은 호프 다이아몬드를 잠깐 소유했거나 혹은 다이아몬드를 그저 만져보기만 했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약 1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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